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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과 고 딘 디엠

지나간 역사 이야기
[미디어 타임즈 = 배수남 기자]


베트남에서 남과 북의 대결이 치열하였던 때에 북월남의 지도자는 호치민(胡志明, Ho Chi Minh, 1890~1969)이었고 남월남의 지도자는 고 딘 디엠(吳廷琰, Ngo Dinh Diem, 1901~1963)이었다. 호지명은 공산주의자였고 고 딘 디엠은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였지만 둘이 공통점이 있었다. 둘 다 철저한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자였다는 점과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겨레와 국가에 헌신하였던 점이다. 호지명은 “조국과 결혼하였다”고 하면서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공적 생활에 헌신하였다. 디엠은 철저한 가톨릭 신앙인으로 젊은 날 한 때는 신부가 되려 하였다. 그도 독신으로 생활하며 헌신적이고 청빈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 달랐다. 호지명은 지금까지도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성공한 지도자로 삶을 마무리 했으나 고 딘 디엠은 실패자로 삶을 마쳤다.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고 미국에도 버림받은 채 쿠데타군에 잡혀 처형당하는 비극으로 끝났다. 두 지도자의 삶의 여정을 살피며 우리들이 배울 바가 많다. 우리 한국인들은 호지명이 공산주의자였다는 점 때문에 무조건 나쁘게 보려는 의식이 있다. 그러나 그가 품은 사상이나 신념을 떠나 호지명은 위대한 지도자가 지녀야 할 덕목들을 골고루 갖춘 인물이었다. 한편 디엠 대통령의 경우는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 역시 호지명 주석처럼 청렴하고 헌신적이고 유능하였다. 그런데 그에게는 3가지 과오가 있었다. 첫째는 자신은 청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형제들을 과도하게 사랑하였다. 형과 동생 그리고 일족에게 권력을 맡겨 국정을 요리하게 하였다. 둘째는 자신이 철저한 가톨릭 신자인 것은 좋은 일이겠지만 가톨릭 인재들만을 발탁해서 중요한 일을 맡기는 잘못을 저질렀다.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타 종교인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지 못하였다. 셋째는 자신은 민족주의 정신이 투철하였음에도 지나치게 미국이란 외세(外勢)에 의지하여 국가의 활로를 열어 나가려 하였다. 민족 스스로의 힘을 길러 그 힘을 바탕으로 삼아 미래를 도모하려 하지 못하였다. 그런 점에서 디엠 대통령은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소중한 교훈을 주고 있다. 호치민은 누구인가 - 호치민의 생애


호치민이 역사의 무대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19년 1월, 베르사이유에서였다. 베르사이유 강화회의 사무국에 호치민은 "베트남의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8개항으로 이루어진 청원서의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1) 호치민과 베르사이유 강화회의 "베트남청원서"


① 구속된 베트남 정치범들에 대한 석방과 사면


② 베트남인과 프랑스인의 동등한 법률적 대우


③ 언론의 자유 보장


④ 집회, 결사의 자유 보장


⑤ 주거이전과 해외 여행의 자유 보장


⑥ 교육과 직업훈련을 받을 권리의 부여


⑦ 낡은 법률에 근거한 정치체제의 변경


⑧ 프랑스 의회에 식민지 인민의 선출된 대표가 참석할 수 있는 권리 보장


윌슨이 천명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이 요청서를 작성할 때까지만 해도 호치민은 정의감이 강한 총명한 청년이었을 뿐이었다. 그 스스로 사용한 이름 우옌 아이 꾸옥(阮愛國)이 뜻하는 것처럼 "애국자 우옌"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베르사이유 회의는 온건하기 그지없는 호치민의 요청서를 매정하게 외면했다. 조선의 대표가 그러했던 것처럼 호치민도 회의장의 복도에서 쫓겨났다. 호치민은 사태의 본질을 명확하게 인식했다. 제국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와 민주주의, 민족자결권은 식민지국가의 인민들에게 자신들의 본질을 감추기 위한 기만적인 언술일 뿐이었다. 그들에게 기대서, 식민지의 다른 굴레를 얻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식민지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영구히 불가능하다는 명백한 사실 앞에서 호치민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2) 베트남혁명의 시작 - 언론활동


혁명이었다. 1917년 연말, 런던에서 파리로 거처를 옮기면서부터 이미 프랑스의 혁명가들과 접촉하고 있던 호치민이었다. 이제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호치민은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뤼마니떼 L'Humanite]에 칼럼을 기고하고, 사회당의 기관지 [르 뽀쀠레르]에도 글을 썼다. 프랑스 좌파지도자들과의 교류하면서 호치민은 단순한 애국적 청년에서 혁명가의 자질을 갖추어갔다. 좌익 잡지들에 기고한 그의 글들은 프랑스의 좌파들을 주목시켰고, 필명 "우옌 아이 꾸옥"은 널리 알려졌다. "우옌 아이 꾸옥"은 프랑스의 좌파들 사이에서보다 프랑스에 살고 있는 베트남 사람들에게 더욱 유명한 이름이 되었다. 장 롱게를 비롯한 프랑스의 거물급 좌파지도자들이 인정하는 베트남출신의 청년지도자가 있다는 사실은 식민지 이주민들에게 소중한 자부심이 되었다. 베트남인들에게 "우옌 아이 꾸옥"이 영향력을 획득한 데는 베르사이유에 제출한 그의 청원서가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비록 차갑게 외면당했지만 우옌 아이 꾸옥의 이름으로 제출된 "베트남 청원서"는 베트남인들 누구의 가슴에나 담겨있는 절실한 요구였다. 그가 청원서를 제출한 사실이 알려지고, 전단으로 인쇄된 청원서가 유포되면서 베트남인들은 가슴은 요동쳤다. 베르사이유 회의에서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라는 전리품을 서로 나누고 있을 때, 우옌아이꾸옥은 위험을 무릅쓰고 베트남의 민족자결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번개나 춘뢰가 습격하여 오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한 사람의 베트남인이 조국과 민족의 권리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마땅히 모자를 벗어야 할 일이었다. 그 당시 프랑스에서는 베트남사람이 두 사람 이상 모이면 반드시 우옌 아이 꾸옥의 일을 화제로 삼았다. 베르사이유 회의에 이어 호치민으로 하여금 혁명의 길을 선택하게 한 또 하나의 사건은 판쭈찐에 대한 프랑스 당국의 사형언도였다. 호치민의 선배이자 협력자였던 독립운동가 판쭈찐은 민족주의 성향의 애국자였다. 1920년 판쭈찐은 하노이에서 발행하고 있던 잡지 [안남인의 조국]에 베트남의 독립을 요구하는 논문을 쓴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판쭈찐을 지지하던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바뷔(Babut)를 만난 호치민은 그의 팔에 기대며 울어버렸을 만큼 깊은 슬픔에 빠져들었다.


베르사이유의 좌절과 민족주의자 판쭈찐의 선례를 딛고 호치민이 발걸음을 옮긴 쪽은 볼세비키였다. 그러나 호치민의 선택은 민족문제에 대한 결별이 아니라 그 연장선상의 것이었다. 투루(Tours)에서 열린 프랑스 사회당대회에 출석한 그는 계급문제에만 주목하고 식민지민족문제를 외면하고 있던 당시 좌파들의 일반적인 태도에 대해 맹렬하게 비판했다. 동지 여러분, 나는 여러분과 세계혁명을 달성하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그렇지만 그 전에 나는 나의 조국 동포에게 가해지고 있는 증오해야 할 범죄에 항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박수).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프랑스 자본주의는 반 세기 전부터 인도차이나로 와서 총칼을 겨누고 우리를 정복하였습니다. 그 이후 우리는 억울하게도 계속 학대받으며, 착취와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게다가 우리를 해치고 말았습니다. 알콜과 때로는 아편을 사용하도록 강요하므로써 우리를 해쳤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학교보다 감옥 수가 많은데 그것도 이미 죄수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사회주의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되는 것만으로 감옥에 들어가게 되는가 하면 어떤 때에는 사형을 당하기조차 합니다. 인도차이나식 재판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규율과 두 가지 기준이 있어 베트남 사람은 유럽 사람과 유럽화한 사람들이 받고 있는 것과 똑같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신문 발행의 자유도 언론의 자유도 없습니다. 물론 집회, 결사의 자유도 없습니다. 이에 비하여 그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아편에 중독되게 한다든지, 알콜로 이성을 잃게 한다든지 하는 일도 가능합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수천 명의 베트남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도 가능하고, 다른 수천 명을 한꺼번에 학살할 수도 있습니다. 동지 여러분, 나는 프랑스의 반 이상의 인구를 가진 베트남 사람이 어떻게 취급되고 있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베트남 사람이 프랑스의 보호 하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헌옷집에서 빌린 양복을 입고 있었지만 전세계 혁명을 말하면서도 정작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 식민지배에 침묵하고 있는 프랑스 좌파들을 향한 호치민의 발언은 준엄하고 통렬했다. 당시 국제 사회주의 운동의 구심체인 인터내셔널은 제 2인터내셔널과 제 3인터내셔널로 분화되고 있었다. 프랑스 사회주의자들도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를 두고 격렬한 토론을 벌이는 중이었다. 호치민은 레닌이 주도하는 제 3인터내셔널을 선택했다. 선택 기준은 단 하나였다. 어느 쪽이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의 투쟁을 투철하게 옹호하는가. 호치민이 애당초 사회당원이 된 것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는 이념에 매혹되어서가 아니었다. 당이 무엇인지를 알아서도 아니었다. 사회당원들이 압박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동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레닌의 식민지해방의 중요성을 언급한 문건 [민족문제에 대하여]는 호치민을 매혹시켰다. 그 문건의 논지는 호치민의 생각과 완벽하게 일치했던 것이다. 호치민이 진정한 의미에서 혁명가가 된 것은 바로 이 순간부터였다. 그는 레닌과 레닌이 지도하는 제3인터내셔널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옹호했다. 제 3인터내셔널을 위해 어디에서도 논쟁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는 확신에 차서 주장하곤 했다.


만약 식민주의를 비난하지 않고 압박받고 있는 사람들을 옹호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당신네들이 행하려고 하고 있는 혁명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레닌의 문건은 호치민이 그때까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이론적인 탐구의 출발점이 되어주었다. 그는 베트남인민에게 최후의 승리를 안겨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맑스-레닌주의를 선택했다.


호치민은 식민주의의 죄악을 규탄하는 [프랑스 식민주의의 심판]을 써서 불어, 중국어, 아랍어 표제를 붙여 출판했다. 그의 필명 우옌 아이 꾸옥은 이제 민족해방의 문제를 고민하는 식민지혁명가들의 상징이 되었다. 식민지배에 대항하기 위한 국제적인 연대조직 국제식민지연합을 만들고, 기관지 "르 빠리아"를 발간했다. 1922년 4월에서 1923년 연말 모스크바에 갈 때까지 호치민은 2년 가까이 이 잡지를 만드는데 전념했다. 그가 직접 칼럼을 쓰고 삽화를 그리기도 했던 이 시기에 호치민은 국제혁명가로서 면모를 확실하게 구비했다. 그는 국제식민지연합의 조직가였고 르 빠리아의 이론가였다.3) 본격적인 베트남혁명의 돌입


프랑스와 소련, 중국을 넘나들며 국제적인 혁명가로 단련된 호치민이 베트남으로 복귀한 것은 1941년 2월 8일이었다. 1911년 남부 사이공에서 상선 라 뚜쉐 트레비유호를 타고 21살의 나이로 베트남을 떠났던 그가 북부 산악지대를 넘어 조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나이 51세였다. 그 31년 동안 호치민은 수 없는 시련과 죽음의 고비를 넘어야 했다. 더는 미룰 수 없는 베트남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베트남으로 돌아오는 그의 곁에는 5명의 동지와 수동식 타자기가 든 싸리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까오방의 팍보계곡에 근거지를 마련한 그들이 4년 뒤 하노이를 접수하고 베트남의 독립을 쟁취하리라는 상상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호치민은 그해 5월 팍보에서 열린 인도차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베트민의 창건을 선언하고 전 인민적 봉기를 준비하자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베트남은 조국을 구하고 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해 재산과 연령, 성별, 정치적 견해의 차이를 초월해 모든 애국자를 결집하며, 일본 파시스트와 프랑스 제국주의를 전복하고 베트남 민주공화국 혁명정부의 수립을 당면 목표로 한다. 공화국의 기는 붉은 바탕에 황색 별(금성홍기)를 붙인다. 베트남 노동자계급당의 위대한 나날들과 함께 지나간 호치민의 79년 생애 중에서도 팍보에 들어와서 하노이에 입성하기까지의 5년은, 그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으나 베트남의 역사에서는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들이었다.


1941년 5월 10일, 인도차이나 공산당 8차 확대중앙위원회를 열고 베트민 창건 결의.


1941년 11월, 12명의 대원으로 유격대 창설.


1942년 3월, 랑선 유격지구로 진출.


1942년 7월, 팍보로 돌아온 다음 국제적 협력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행.


1943년, 장제스 군대에 체포되어 30여개 감옥을 전전하며 죽음을 넘나듦.


1944년 12월 22일. 서른네 명의 대원으로 베트남 해방무장선전대 창설하고 보 구엔 지압을 대장으로 임명.


1941년에서 1944년까지 4년간의 호치민 연보는 그 자체가 베트남 현대사의 요약본이다. 그는 아무도 꿈꾸지 않았던 것을 꿈꾸었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넘어,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일을 해냈다. 서른네 명의 대원으로 출발했던 베트남 해방무장선전대는 1945년 6월 5천정의 무기를 보유한 인민해방군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100만명이 거주하는 베트남 북부 6개지역을 접수한 인민해방군이 하노이에서 80Km 떨어진 떤짜오까지 진출한 것도 6월이었다. 호치민의 오른팔 보구엔지압장군이 이끄는 인민해방군은 1946년 8월 16일 군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하노이에 입성했다. 1945년 9월 2일, 바딘광장에 인산인해를 이루며 모여든 군중 앞에서 호치민이 소개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당시에 사용하고 있던 호치민이라는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왜소한 체구에 수염을 기른 그가 바로 신화적 인물 "우옌 아이 꾸옥"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광장이 떠나갈 듯한 환호를 보냈다. 그가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선언서를 읽어나가는 동안 광장은 박수와 환호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베트남과 호치민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프랑스는 일본에게 빼앗겼던 자신의 옛 식민지를 되찾겠다고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호치민의 베트남 민주공화국은 나라의 기틀을 잡기도 전에 항불전쟁을 치러야 했다. 호치민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수모를 감수하며 양보와 타협을 시도했지만 요지부동의 프랑스군은 하노이를 침공했다. 1946년 12월 20일, 호치민은 베트남 민주공화국 주석의 이름으로 전면적인 항전을 선언하며 다음과 같이 국민들에게 호소했다.전국의 동포 여러분.


우리는 평화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까지 양보를 되풀이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양보하면 하는 만큼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이를 이용해 우리의 권리를 침해해 왔습니다. 우리는 조국을 잃고, 다시 노예의 지위에 만족하기 보다는 모두를 희생시키는 쪽을 선택합니다. 동포 여러분, 일어납시다.


총이 있는 사람은 총을, 칼이 있는 사람은 칼을, 칼이 없은 사람은 곡괭이나 막대기라도 좋습니다. 일어납시다.아무도 이 전쟁에서 베트남이 이길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세계를 경악시킨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때까지 압도적인 무장력을 지닌 프랑스는 베트남 북부를 파괴와 살육의 땅으로 만들었다. 1954년 5월 7일, 3개월에 걸친 격렬한 공방 끝에 프랑스군이 철의 요새라고 자랑하던 디엔비엔푸가 베트남군대에 의해서 함락되었다. 베트남의 승리, 프랑스군의 궤멸과 항복. 포병 3개 대대, 공병 1개 대대와 기갑중대. 200대의 트럭을 보유한 수송부대. 그리고 70대의 항공기를 보유한 상설 비행중대를 포함한 16,200명의 병력으로 3개 기지 47개 방어거점과 지하참호로 이중 삼중의 방어망을 갖춘 난공불락의 요새가 항공기 한 대 없는 베트남군대에게 궤멸당한 것이다. 식민지군대가 제국주의 본국과 싸워 이긴 최초의 전면적인 승리였다. 프랑스군 사령부를 최종적으로 장악하고 사령관 카스트리를 포로로 잡은 보구엔지압 장군은 승전 1보를 호치민에게 타전했고, 호치민은 대답했다.


한 작은 식민지 국가가 역사상 처음으로 식민주의 본국을 무찔렀다. 이것은 베트남 인민의 영광스러운 승리이자 세계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주의를 수호하고 있는 세력의 승리다.


호치민은 일찍이 1951년에 예언한 바 있었다. 오늘, 코끼리와 힘 겨루기를 하고 있는 것은 메뚜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일, 코끼리는 내장이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베트남 인민들을 제외하고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던 그의 예언은 3년 만에 현실이 되었다.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신화이고 기적이었지만, 신화처럼 싸우고 기적처럼 승리한 호치민과 그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디엔비엔푸에서 항복한 프랑스가 물러갔다. 이른바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났다. 그러나 베트남과 호치민이 견뎌야 할 시련은 여기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더 무서운 상대가 프랑스와 자리를 바꾸었다. 미국이 왔다. 1955년 전쟁은 재개되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쪽의 응오딘디엠은 합의된 남북 총선거를 거부하고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의 소탕작전에 들어갔다. 1964년 8월 2일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미국은 직접 베트남을 침공했다. 미군은 54만명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1200대의 전투기를 동시에 투입하며, 1500만톤의 폭탄을 베트남의 산하에 퍼부었다. 미군이 사용한 폭탄의 양은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전세계에 투하되었던 양의 2.5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프랑스가 걸어간 길과 다르지 않았다. 1972년 미국은 수렁처럼 빠져들기만 할 뿐 끝이 보이지 않는 베트남으로부터 발을 빼기 시작했고, 호치민의 군대는 1975년 4월 30일 남쪽 수도 사이공의 대통령궁을 접수하고 통일을 이룩했다.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무력을 지닌 베트남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밀은 어디에 있었을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호치민의 존재를 빼놓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호치민은 이 전쟁이 절정에 달했던 1969년 9월 3일, 79년의 생애를 마감했다.


항미전쟁은 호치민이 죽은 다음에 끝났지만 그 전쟁을 이끈 정신적 지주는 박호, 호아저씨, 호치민이었다. 호치민은 지치지 않는 베트남의 자부심이고 투명한 영혼이다. 1975년의 사이공함락작전의 이름은 호치민운동이었다. 사이공을 함락시킨 다음 군인들을 상대로 승리의 순간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올랐는가를 조사했을 때 압도적 다수가 호치민이었다. 승전 직후 한 시인이 작사한 노래를 부르며 베트남사람들의 누구나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호치민 (Ho Chi Minh 1890∼1969)


베트남 정치가. 게안성(省) 출생. 본명은 구엔타트탄(Nguyen That Thanh).


민족해방 최고 지도자이자 베트남민주공화국 초대 대통령이다. 프랑스 식민지배에 대한 민중봉기가 한창일 때 하급관리 출신 유학자의 아들로 태어나 반(反)프랑스운동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베트남 북부 위에의 코크호크대학에서 공부한 뒤 1911∼1916년 프랑스 외항선 요리사가 되어 각국의 현실을 경험하였으며, 1917∼1923년 프랑스에서 구엔아이歸(애국자 구엔)이라는 이름으로 식민지 해방운동에 참가, 혁명지도자로 성장하였다. 1919년 제1차세계대전 종전처리를 위한 베르사유강화회의에 정치범 석방, 집회•결사의 자유 등 베트남인민의 자결을 촉구하는 <조국해방을 위한 8항목>을 제출함으로써 유명해졌다. 1920년 프랑스공산당 창설에 참가, 당원이 되었고 다음해 프랑스 식민지인민연맹을 결성, 기관지 《르 파리아》를 창간하였다. 1924년 모스크바코민테른 제5차대회에 참여한 뒤 코민테른에 의해 중국에 파견되어 베트남 청년혁명동맹을 조직, 혁명운동을 지도하였다. 1930년 홍콩으로 건너가 국내 좌익조직을 결집하여 베트남공산당(뒤에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창설하였다.


이듬해 홍콩에서 영국 관헌에 의해 체포되었는데 이때 사망설이 나돌아 모스크바에서는 장례식까지 치러졌으나 1933년 석방되었다.


1941년 베트남에 잠입,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주축으로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를 규합하여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을 결성, 총투쟁을 준비하였다. 1942년 투쟁지원요청을 위해 중국에 갔다가 중국국민당에 체포, 투옥되었으며, 이때부터 <깨우치는 자>라는 뜻을 지닌 호치민[胡志明(호지명)]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하였다.


석방 후 1945년 8월 총 봉기를 감행하여 하노이를 점령,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하고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46년 프랑스와의 교섭이 결렬되자 대(對)프랑스 항전을 직접 지휘하였고 1954년 디엔비엔푸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같은 해 제네바협정이 체결되어 북베트남 정권이 확인되었다. 그 뒤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하여 1955년 북위 17˚선 이남에 반공산주의 베트남정권이 수립되자 조국재통일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미국과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혁명정신을 고무시키며 항전하다가 1969년 9월 3일 심장병으로 죽었다.


30여 년 동안 베트남 민족운동의 최고 지도자였으며 제2차세계대전 후 아시아의 반식민지운동을 이끈 가장 영향력 있는 공산주의 지도자로 꼽힌다. 본명은 응웬 닷 탕(Nguyen Tat Thanh)이지만 어릴적 이름은 응웬 싱 콘이라고 불렀다. 호치민은 가명과 필명이 160여개가 되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베트남의 중부지방이며 행정구역은 응헤안주에 있는 호앙쭈(Hoang Tru)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훼이서 북쪽으로 360km떨어진 오지였으며 주변환경은 혹독했다. 그의 아버지는 농민출신으로 평범한 지식인이였다. 그의 아버지가 훼에서 관직에 올랐지만 그해 어미니가 사망하였고 그의 아버지도 관직에서 오래가지 못해 면직되었다(1929년 사망).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응웬 닷 탕의 생활은 더욱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1911년 발전된 서구의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의 6000톤급 증기선(船) 아미랄 라투슈 트레빌호의 견습 요리사로 프랑스에 건너갔다. 1914~1919년까지는 영국 런던과 미국 뉴욕에서 하인, 견습공 등 밑바닥 인생을 전전했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야와 민족주의적 가치관은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1919년 세계1차 대전이 끝나면서 파리에 정착하였다. 이때부터 응우옌 아이 꾸옥[阮愛國]이란 이름으로 식민지해방운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파리는 세계 식민지국가에서 건너온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중심지였다. 1919년 6월 베르사유회의에 베트남대표로 출석하여 '베트남 인민의 8항목의 요구'를 제출하여 일약 유명해졌다. 1920년 프랑스사회당 투르대회에서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지지파에 가담하고, 프랑스공산당 창립과 함께 그 당원이 되었다. 이듬해 공산당의 지원으로 프랑스식민지인민연맹을 결성하고, 기관지 《르 파리아》를 편집•발행하였다. 1924년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 출석, 동방부(東方部) 상임위원이 되었고, 코민테른에서 약 2년간 머물면서 공산당 혁명사상을 익혔다. 사회주의 혁명가로서 자질을 배운 그는 코민테른으로부터 지령을 받고 중국 남부 및 타이로 파견되었으며 조국 베트남의 주변에서 혁명운동을 계속하였다. 1930년 코민테른에 의하여 권한을 부여받고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창립하였다. 이대 그는 리 투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중국에 근거지를 두고 베트남 혁명청년동지회를 결성하였고 이곳에서 훈련받은 베트남인들을 인도차이나 지하조직으로 파견하였다. 《청년》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면서 조직을 점점 강화해 나갔다. 1931년 6월 6일 홍콩의 영국 경찰에게 체포되었다가 1933년 석방되어 일단 모스크바로 돌아갔다가, 1940년부터 중국 쿤밍에서 중국 공산당 조직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1941년 2월 베트남에 잠입하였다. 당시 인도차이나는 점차 세력이 약화되는 프랑스와 아시아로 지배영역을 넓혀가는 일본이 협약을 맺어 공동으로 식민지배를 하고 있었다.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중심으로 월맹(또는 베트맹 :베트남독립동맹회)을 결성하여 민족해방을 위한 독립 총봉기(總蜂起)를 목표로 세력을 키웠다. 그는 이때부터 응웬 아이 꾸옥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호치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2차대전이 중반에 이르면서 일본의 패배가 직감되자 중국과 미국을 대상으로 전략적으로 접근하여 그들의 지원을 받아내었다. 하지만 1942년 중국 중경을 방문하였다가 프랑스와 일본의 스파이로 오인되어 중국국민당에 체포되었다. 그는 이런 고난을 극복하고 1943년 9월에 석방되었고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월맹이 임시과도정부임을 승인받았다. 미국은 낙하산 부대까지 투입하여 월맹을 지원하였는데 이는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이었다. 호치민은 이런 상황을 잘 이용하였고 미국의 지원으로 민족해방혁명을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되었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으로 태평양전쟁이 끝나자 호치민을 의장으로 하는 민족해방위원회가 결성되어 총봉기하였다. 하노이, 훼에서 연일 시위가 일어났으며 월맹은 베트남 중부와 북부 지역을 빠르게 장악하였다.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은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호치민은 정부 주석으로 취임하였다. 1946년 퐁텐블로회의가 결렬되자 프랑스에 대한 항전(抗戰)을 직접 지휘하여 1954년 프랑스를 상대로 디엔비엔푸의 전쟁을 승리하여 독립을 지켰다. 하지만 구소련과 중국의 간섭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는 못했다.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은 17도 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분할되었다. 베트남은 극도의 정치불안에 휩쌓이게 되었고 곧이어 남과 북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며, 1969년 9월 2일 9시 47분 주석(대통령) 재임 중 심장병으로 급사하였다. 그가 사망한 이후에도 베트남 전쟁은 3년간 지속되었다.



미국 독립선언의 대의에 깊이 공감한 공산주의자 호지명: 실제 외국에 대한 경험이 전무하다시피했던 모택동등의 공산주의자와 달리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등을 돌며 체험을 통해 정세에 대한 냉철한 판단을 했던 그는 단순한 투사가 아니었다. 실제로 공공도서관에서 방대한 독서를 통해 동서고금의 수많은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시킨 "지식인 정치가" 였다. (특히 불어, 영어에 능통했다는 사실) 오히려 "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 정신" 을 구현한 것은 "베트남인 호지명" 이 아니었을까?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OSS 요원들과 베트민 대원들 : 이 순간 잔악한 일본군에 맞서 혈투를 벌였던 전우들이 세월이 지나 서로의 목숨을 노리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베트남의 첩혈쌍웅 : 20세기의 가장 무서운 정치지도자와 군사지휘관 두 사람.돈으로도 권력으로도 세상 무엇으로도 "베트남의 독립"을 위한 그들의 의지를 꺽지는 못했다. 한때 미국의 든든한 동지들 이었지만 적이 된 그들은 결국 미국을 패전으로 몰아넣는다.



20세기의 위대한 전력가 중의 한명이 분명한 보 구엔 지압 장군역설적이게도 프랑스에게 치욕적인 참패를 안긴 디엔비엔푸 전투를 이끈 보 구엔 지압은 청년시절 바로 식민지배국 프랑스의 전략가 나폴레옹 과 손자의 저서를 탐독하고 깊은 연구를 했다.후일 그가 벌이는 신출귀몰한 기습작전과 비정규전은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가 되어 패망하기 직전 유럽각국에서 승승장구할 당시를 연상시킨다. 대학에서 정치경제와 법학을 전공한 그는 역사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제발 생각하는 군인이 되자! "불온도서"니 미친 짓 좀 그만하고!)- 배신당한 사랑 "OSS-호지명 커넥션" 당시 베트남을 식민통치하던 프랑스는 독일에 패한 후 비시괴뢰정부가 성립하고 베트남에서 그 실질적 영향력을 잃게된다. 이 틈을 타서 동남아로 진출하던 일본이 허수아비같은 비시정부를 대체해 베트남을 침략하게된다. 이에 맞서 프랑스에 대한 무장독립투쟁을 하던 호지명은 일본을 향해 그 총구를 돌리게 된다. 호지명 휘하의 유격대원들은 일본군기지 정찰, 매복기습, 추락한 연합군 비행사 구출등의 임무를 OSS와의 협력하에 추진하게된다. 이때 OSS요원들("DEER TEAM")은 베트남 유격대원들에게 요인암살, 폭파 등 게릴라 전의 기술을 전수해주게 되는데 20여년후 미군병사들을 괴롭히게 되는 월맹의 군사기술은 다름아닌 미국에 의해 교육된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호지명이 정글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메게 되었을때 그를 구해준것은 바로 미국이 공수해준 미제 의약품과 OSS의 군의관들이었다고 한다. 실제 실무를 담당하던 미 OSS요원들은 보고서에서 호지명이 베트남 민중의 신뢰를 받는 가장 유망한 지도자라는 사실을 밝히며 호지명을 지원해줄것을 상부에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급장교들의 견해는 깡그리 무시되고 독일에 협력하던 프랑스는 2차대전이 끝나자 마자 호지명은 중국의 앞잡이인 극렬공산주의자라는 악선전을 계속하지요. 나중에 미 상원의 조사위원회에서도 우방국 프랑스가 자신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여 미국을 베트남으로 끌어들인것에 대해 엄청난 비판이 제기됩니다. ) 더구나 그들은 프랑스에 의한 베트남의 식민통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독립투쟁을 하는 호지명에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었다. 베트남 독립을 선언하는 식장에는 미군장교들이 참석했으며 축하비행을 해준것은 바로 미 공군의 전투기들이었다. 역사에 가정은 필요없다지만 만약 미국이 호지명을 지원하였다면 아마도 베트남은 동남아에서 가장 든든한 미국의 우방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본다. 그리고 미군 5만 7천명의 죽음도 아마 필요치 않았으리라. 프랑스에 대한 환상을 깨게 된 역사적 사실들 1. 프랑스 점령하 베트남의 플렌테이션 농장들에서는 사망한 베트남인의 시체를 비료처럼 사용했다고 합니다. 2. 프랑스와 베트남을 오가는 여객선의 급사로 일하던 베트남 소년을 작은 잘못을 했다는 이유로 상어가 우글거리는 바다에 집어 던져버렸다는 일화.3. 독일의 프랑스점령에 대항한 레지스탕스들의 위업을 그토록 찬양하고 독일의 점령을 성토하지만 그들도 만만치 않았죠 무고한 보 구엔 지압장군의 가족 (그의 아내, 누이, 그의 아버지와 형수까지 ) 은 보 구엔 지압이 망명하고 있는 당시에 프랑스 식민 당국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 살해당합니다.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프랑스의 "자유 평등 박애" 는 어디로 갔는지. 이런 사실들을 보면 국적과는 상관없이 누구나 힘을 가지면 그 힘을 남용하여 남을 억누르려 하고 결국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인간성도 파멸되어 버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독 해군 병사들과 함께한 호치민 : 소탈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애연가이자 음악애호가로서의 면모 파리시절 호치민은 사진수정가로 일하기도 했다. 파리의 멋진 레스토랑들은 가난한 그로서는 그림의 떡이었지만 그런 그도 단 하나의 사치에 탐닉한 적이 있었다.그것은 바로 미국담배였다. 그는 "카멜" 과 "럭키 스트라이크" 를 선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약간의 돈이 생기면 그는 뮤직홀에 들려서 모리스 슈발리에의 매력적인 곡들을 듣곤 했다. (이후 1960년대 미국 언론인들과 인터뷰를 나눌때도 그의 날카로운 지성과 유창한 영어실력, 미국역사에 대한 방대한 지식, 끊임없는 흡연으로 그들을 놀라게 했는데 이때는 미국의 담배 세일렘 (American-made Salems) 을 즐겨 피웠다고 합니다. 타임誌에서 인용 프랑스 동양학자인Paul Mus는 1946년과 1947년에 호치민과 장시간 대화를 나눈후 호치민을 이렇게 평했다 " 독립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는 결코 부패하지 않을 혁명가이다. 그는 차라리 한 명의 성자이다.(a la Saint Just) "- 미국과 북베트남이 전쟁중이던 1969년 9월 4일자 뉴욕타임스誌에 난 호치민의 부고에서 인용 외람되고 발칙한 상상이지만 베트남과 미국이 우방국이었다면 호치민은 미국 담배회사가 가장 선호하는 광고모델이 아니었을까요? 그 유명한 말보로 맨 대신 호치민이 말보로의 광고모델로 등장하였다면 자신의 죽음에 관해서도 그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았다. 건강을 위해 담배를 끊으라는 주변사람들의 강권에도 불구하고 그는 흡연을 계속했다" 자네들도 나처럼 나이를 많이 먹으면 담배의 해악에 관해서는 전혀 염려하지 않게 된다네" ( 담배회사들이 반색할 만 한 발언이지요! )- 미국과 북베트남이 전쟁중이던 1969년 9월 4일자 뉴욕타임스誌에 난 호치민의 부고에서 인용 목민심서(牧民心書)와 호지명(胡志明) 목민심서 48권은 이 땅의 선각자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이 쓴 글이다. 다산 선생은 절세의 경륜을 품었으나 소인배들의 질시를 받아 전남 강진에 유배(流配)된 채로 18년의 세월을 보냈던 어른이다. 다산은 자신이 품은 목민(牧民)의 꿈을 목민심서에 담았다. 다산 선생이 이 책 이름을 지을 때의 심정을 책의 머리말에 쓰고 있다. 자신이 품은 뜻을 현실 속에서 펼칠 길을 찾지 못한 채 유배되어 사는 몸으로 헛되이 세월만 보내기에 마음으로만 쓰는 글이라 하여 심서(心書)란 제목을 붙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월남의 지도자 호치민(胡志明)이 다산의 목민심서를 애독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바다. 중국, 한국, 일본, 월남 등은 같은 한자문명권(漢字文明圈)이기에 한문(漢文)으로 쓰인 목민심서가 이들 나라에서 널리 읽혀져 왔다. 특히 월남의 공산주의자요, 민족주의자로서 월남 통일의 대업을 성취할 수 있게 하였던 비전과 의지의 인물 호치민은 평생토록 다산의 목민심서를 애독하였다고 한다. 그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던 시절에 급히 도망하게 될 때에는 다른 소지품은 못 가져가도 목민심서만큼은 꼭 들고 도망하였다고 전해진다. 백성 돌보기를 어버이가 자식 돌보듯이 하라는 다산의 목민정신(牧民精神)이 지금 이 시대에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나라 사정이 혼란스러워질수록 지도자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지도자의 인격과 경륜의 정도에 따라 나라와 백성들의 사정이 달리지겠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이 나라에 호지명(胡志明) 같은 지도자가 나라를 이끌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내가 호지명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그가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정독하였다는 말을 듣고 나서 부터이다. 그는 비록 공산주의자이었지만 우리가 아는 여느 공산주의자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는 평생에 정적을 숙청한 적이 없었고 자신을 우상화하거나 신격화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국민들로부터 ‘호(胡) 아저씨’로 불리면서 일생을 청빈하게 독신으로 살았다. 죽을 때는 옷 한 벌, 신 한 켤레만 남기고 죽었다. 마치 메뚜기와 코끼리 사이의 싸움에 비유할 수 있을 월남과 미국간의 전쟁에서 월남이 승리 할 수 있었던 것은 지도자 호지명의 인격과 지도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호(胡)가 월남 국민들로부터 어느 정도의 지지와 신뢰를 받았느냐하면 남• 북 월남이 서로 전쟁을 하던 중에도 호지명의 생일이 되면 적인 남쪽 월남에서도 국민들이 가게 문을 닫고 그의 생일을 기릴 만큼 전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죽게 하면서도 궁전을 지은 북녘의 지도자나, 나라 경제가 어떻게 되던 오직 선거에만 신경쓰면서 갈등을 부추겨 편가르기에 정신없고 민족의 백년대계를 위한 역사 바로세우기 조차 정략에 이용하려 드는 지도자에 비하면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있는 지도자였다.



호지명의 사상을 간추려 말하자면 ‘3꿈 정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민족주의자이면서 동시에 공산주의자로서 자기 나름대로 베트남을 구하기 위해 일평생을 헌신하면서 ‘3꿈 정신’을 실천하였다. 그리고 지금 베트남을 이끌고 있는 그의 후계자들도 명목상으로는 이 정신을 지도력의 원칙으로 삼고 있다.첫째는 함께 산다는 정신이다.둘째는 함께 먹는다는 정신이다.셋째는 함께 일한다는 정신이다. 지도자가 백성들과 함께 살고, 함께 먹고, 함께 일하는 공동체 정신을 삶으로 실천할 때에 온 국민의 역량이 통합되는 것이요, 어떤 난국도 극복하여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호지명은 그렇게 살았다. 그는 최고 지도자이었을 때에도 자신을 위해서 특권을 누리지 않았다. 국민들과 동고동락함으로써 이로써 쌓은 국민적 신뢰감을 바탕으로 국가통일까지 이루는 에너지의 원천이 되게 하였다. 오늘의 한국에도 이런 지도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그 지도자를 중심으로 온 국민이 힘을 모아 통일한국, 선진한국, 복지한국을 건설하여 나갈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호지명이 당대에 온 국민의 지지와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다음의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첫째는 어떤 경우에도 청렴결백(淸廉潔白)했던 삶의 자세 때문이었다.둘째는 그가 교육입국(敎育立國)에의 비전을 품고 젊은이들을 교육시켜 국가의 앞날에 대비하였던 점이다.셋째는 그가 힘없는 백성들과 함께 하고 소외된 계층을 항상 품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평생토록 얼마나 청렴했던가는 그의 죽음 후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가 세상을 뜬 순간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입었던 홑겹의 옷 한 벌이었다. 그리고 그는 죽음 직전에 자신의 장례식에 대하여 유언하기를 “국민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화장으로 하라”고 일렀다. 또한 그는 전쟁 중에도 유능한 젊은이들을 선발하여 해외유학을 보내면서 그들에게 일렀다. “앞으로 나라가 반드시 통일이 될터이니 통일조국을 이끌 실력을 길러라. 최전선에서 전투하고 있는 동지들을 생각하며 전투하는 정신으로 국가경영의 실력을 쌓으라”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병사들에게도 일렀다. “그대들이 전쟁에서 승리를 하여야 외국에 나가 국가경영의 실력을 쌓고 있는 동지들이 미래에 일류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 이런 그에게 아무도 특혜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었다. 유학중인 젊은이들이나, 전투중인 젊은이들이 한결같이 그를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호지명이 임종에 임박하여 세 가지 유언을 남겼다. 그 내용이 호지명의 사람 됨됨이를 잘 드러내 주는 내용이다. 그가 비록 공산주의자여서 우리와 사상과 생각은 다를지라도 인간적인 면에서는 이런 점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한 인물 특히 지도자를 평가 할 때에 그의 사상이나 신앙은 나와 다를지라도 그의 인격이나 생활신조 같은 면에서의 훌륭한 점은 별도로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호지명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고 빼어난 애국자였다. 나는 그의 민족주의 정신과 애국애족하는 정신을 본받으려 한다. 그의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은 한치도 받아들일 수 없다. 이는 내가 원효 스님을 존경하고 따르지만 그의 종교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호지명이 유언으로 남긴 세 가지 유언 중의 첫째는 자신의 무덤을 만들지 말고 시신을 화장하라. 매장하여 무덤을 만들면 인민들에게 폐를 끼치기 쉽고 또 우상화하거나 신격화 할 위험이 있노라 하였다. 둘째는 이제 곧 전생이 끝날 터인데 전후 미국 편을 들었던 남월남의 누구도 보복하지 말라. 모두가 한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처신한 것이니 과거지사는 없었던 것으로 하고 모든 남녘 백성들을 새로운 통일국가의 새 국민으로 새 출발하자는 것이었다.호지명이 죽음에 임하여 남긴 유언의 세 번째는 전쟁이 끝난 후 전쟁 중에 전사한 장병들의 아내나 자녀들을 국력을 기울여, 성심성의를 다하여 국가가 돌봐 줄 것이며 전쟁 중에 다친 상이군인들 역시 국가가 지성으로 우대하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호지명이 죽음에 임박하여 남긴 3가지 유언 중에서 앞에 소개한 첫 번째 유언인 무덤을 만들지 말고 화장을 하라는 대목에서 그가 이르기를 화장을 하되 재를 세 등분으로 갈라 월남의 북구, 중부, 남부에 한 곳씩을 택하여 재를 뿌리게 하라. 통일된 조국이 번영하는 밑거름이 되기를 원한다 하였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이 이 유언을 따르지 않고 수도 하노이에 묘지를 만들어 성역화(聖域化)하고 있다. 지금 하노이를 방문하면 날마다 수많은 참배객들이 그의 묘지를 둘러보고 그를 참배하고 있는 길고 긴 줄을 볼 수 있게 된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의 깊은 의도를 후계자들이 헤아리지 못하고 그의 시신을 정치에 이용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그리고 그가 상이군인들을 정성을 다해 돌보라 하였던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월남 전역에 가는 곳마다 상이군인들이 이권을 차지하여 시장 귀퉁이나 조그만 매장까지 상이군인들이 차지하여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가 죽은지 30년이 지났으나 아직 월남이 빈곤을 벗어나지 못한 채로 가는 곳마다 부패와 무능이 터를 잡고 있음을 접하게 된다. 이런 점은 그가 신봉하였던 공산주의의 한계점인 것을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이에 비하면 우리 한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선택하였던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웠던가를 실감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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